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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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누구신가?

온 우주를 만드신 그 분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형체도 없고 부피도 없고 무게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시고, 그 생각으로 이 우주와 그 속의 모든 생명체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우리도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몸을 움직여서 행동을 하고,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생각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은 우리 몸이 생명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 몸 속에 들어왔다가, 생명이 끝나면 몸을 떠납니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 몸 속에 있는 마음은 내 핸펀 안에 있는 메모리 칩이라고 한다면 온 우주를 만드신 그 분은 구글 본사의 메인 서버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더 성능이 좋은 컴퓨터입니다. 지금 인간들이 개발하고 있는 양자컴퓨터, 그것도 무한대의 용량을 가진 양자컴퓨터와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우리 핸펀 안에 있는 칩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양자컴퓨터 칩이고, 큰마음님은 무한대의 능력을 가진 양자컴퓨터의 성능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과 이 세상을 만드신 그 분의 마음은 본질과 속성은 동일합니다만 규모와 능력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마음은 우리 마음, 내 마음이고, 이 우주를 만드시고 지금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 분은 본래부터 계시는 마음이신데, 우리 마음과 구분하기 위해서 큰마음으로 불러드리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우리가 그 분을 부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로 복받는 사람들이 믿는 사실

온 우주를 만드신 그 분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형체도 없고 부피도 없고 무게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시고, 그 생각으로 이 우주와 그 속의 모든 생명체를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우주와 생명체를 만드신 다음에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그 분께서 만든 생명체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즐기는 모습을 구경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 세상은 엄청나게 커다란 놀이공원이고, 우리는 그 놀이공원을 즐기는 어린이들입니다. 용인 에버랜드 처럼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금방 싫증이 나는 그런 놀이공원이 아니라 서바이벌 게임에 나오는 시설처럼 위험과 난이도가 있는 놀이공원입니다. 이 놀이공원을 최대한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이 씌어져 있고, 우리가 교육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놀이공원을 만드신 그 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이 놀이공원을 활용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놀이공원을 만든 사람은 어떤 기분이 될까요? 만족스럽고 즐겁겠지요. 만약 그 놀이 공원을 만드신 분이 우리 부모님이시라면 어떨까요? 더 큰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시겠지요. 큰마음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 이 놀이공원을 만드셨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 그리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있게 만드신 분이고, 이 세상의 부모님은 그 분의 설계에 따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에서 한 역할을 하신 분들입니다. 원래 설계하고 제작과정을 모두 만드신 분이 우리 부모님보다 더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큰마음님은 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만드셨을까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종교 창시자들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꿈에서 만난 적도 없고, 환상을 보거나 대면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뜻과 의도를 제가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어린 아기는 부모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어른과 아기는 지적 능력이나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우리를 만드신 큰마음님의 격차에 비교하면 인간의 아기와 어른은 지적 능력과 격차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우주와 우주 안의 모든 물리법칙을 설계하고 실행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모든 별과 그 안의 생물과 무생물이 생겨나도록 하신 큰마음님의 생각과 뜻을 우리의 작은 마음이 온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참선과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분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이 지금 우리들 중에서 약간의 과학적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훨씬 부족하고 때로는 아주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우리와 같은 메카니즘을 가진 마음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과 이 세상을 만드신 큰마음님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다만 규모가 엄청나게 달라서 실행할 수 있는 기능도 엄청나게 다른 것 뿐입니다. 비교를 하자면 물 한방울과 바다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방울의 물이나 바다를 구성하고 있는 물이나 모두 H2O라는 분자식을 가진 동일한 물체입니다. 하지만 한방울의 물이 할 수 있는 일과 바다가 할 수 있는 일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바다는 배를 띄우고, 구름을 만들고 파도나 해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하는 바다를 구성하는 단위는 한 방울의 물입니다. 큰마음님을 구성하는 마음도 우리 마음과 동일한 기능과 크기를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과 똑같은 속성을 가진 마음이 엄청난 규모로 모여서 작동하면 마음 하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 핸펀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속성과 기능을 가진 칩이 엄청나게 모여있는 구글 본사의 메일 컴퓨터가 하는 일이 다른 것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동일한 물방울, 동일한 칩이 엄청난 숫자로 모여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큰마음님을 구성하고 있는 단위 마음이 큰마음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큰마음님이 만들어 놓은 생명체 안으로 들어오면 그 생명체가 살아서 작동을 합니다. 큰마음님, 그리고 큰마음님을 구성하고 있을 때의 우리 마음은 이 우주의 어떤 물리적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마음님을 구성하고 있던 마음이 큰마음님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서 생명체 속으로 들어가면, 우주의 물리적 법칙과 그 생명체의 설계된 기능과 능력의 범위만큼 제약됩니다. 이렇게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물 속에서 오래 있으면서 어떤 작업을 하려면 잠수복을 입어야 합니다. 작업용 잠수복을 입고 물 속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잠수복을 입고 물 속에 들어가면 잠수복에 달린 물안경을 통해서만 밖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계가 좁고, 시 거리도 짧아집니다. 행동도 둔해집니다. 잠수복을 입고 물 속에서 행동할 때는 지상에서 행동할 때보다 훨씬 둔하고 느립니다. 잠수복을 입은 사람의 능력은 그대로 있지만, 그 잠수복이 주는 제약 때문에 그 사람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마음님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을 때, 또는 큰마음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생명체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이나 그 반대의 과정에서 몸을 벗어버렸을 때는 우리 마음이 볼 수 있는 범위,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거의 무제한이 됩니다. 임사체험, 즉 죽어서 마음이 육체를 떠났다가 도로 육체가 회복되어서 마음이 육체 안으로 돌아온 경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육체를 떠난 순간부터 마음은 360도 시야를 갖고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잠수복을 벗고 지상으로 올라온 잠수부가 잠수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보고, 훨씬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육체를 떠난 마음은 다른 생명체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돌아 오기도 하고, 큰마음님께로 돌아가서 그 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들이 있습니다. 그 증언들에 대한 소개와 제 평가는 다음에 따로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방법으로 주제를 한정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잘 살아 가려면 먼저 왜 이 세상이 만들어졌는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나서 살게 되는 것은 일종의 벌이고, 그 벌은 우리가 어떤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고, 죽어도 다시 다른 육체를 입고 태어나서 반복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종교는 이 세상에 사는 과정을 생노병사,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고, 그 네가지 일은 모두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총체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고, 윤회를 하기 때문에 죽음으로도 그 고통을 끝내지 못하고, 엄청난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만 고통의 반복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잠깐 생각해봐도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사실과 전혀 다른 그 주장이 3천년 이상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부모들은 기뻐합니다. 생, 즉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라고 주장하는 그 종교에서 많이 해 주는 일이 아기를 낳도록 백일기도를 해 주는 것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의 첫번째 고통인 ‘생’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도록 기도를 하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닌가요?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요? 왜냐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니까요. 어떤 존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바라는 점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하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하는 종교니까요? 그런데 그 종교의 주특기 중의 하나가 아이를 낳게 해주는 백일기도입니다. 태어나는 아기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고’를 겪도록 하는 저주인 것이지요. 그런 저주를 기도로 하는 것은 나쁜 짓이지요. 그런데 그처럼 가르침과 실행이 논리적으로 모순된 종교가 삼천년 이상이나 번창하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도록 백일 기도를 해주는 종교의 행위가 정당화되려면 오로지 한가지 해결책 밖에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라고 하는 그 종교의 교리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지요.

태어나는 것은 고통의 시작이 아니라, 즐거움의 시작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든, 축생으로 태어나든 이 세상에 생명체로 살기 시작하는 것은 즐거움의 시작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원합니다. 그것은 죽음 뒤에 더 큰 고통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죽으면 이 세상의 즐거움이 일단 끝나기 때문입니다. 놀이공원에서 문닫을 때까지 버티는 아이들이 집에 가서 힘든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놀이 공원에 입장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물론 큰마음님이십니다. 그 큰마음님이 이 우주와 세상을 만들때 우리 마음은 그 큰마음님에게 소속되어 있었지요. 물 한 방울이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도 포함된 큰마음님이 이 우주와 온 세상과 그 속의 만물을 만드셨지요. 형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크기도 없는 큰마음님이 생각 만으로 이 우주와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옛날 사람들은 전혀 상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짐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 규모나 복잡성의 면에서는 어린애가 만든 나무 장난감 자동차와 최고 사양의 포르쉐 이상의 차이가 있지만, 원리와 구조 면에서는 약간의 닮은 점이 있는 것을 인간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게임입니다. 컴퓨터 게임 중에 문명 건설 게임같은 것이지요. 그 문명 건설 게임은 모든 움직임을 컴퓨터 밖에 있는 존재가 관장합니다만, 어떤 영화에서는 컴퓨터 게임을 하던 사람이 그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게임 캐릭터가 되어서 게임에 참여합니다. 비교를 하자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 우주를 만드신 큰마음님에게 소속되어 있는 마음들이 큰마음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캐릭터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이 우주와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큰마음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큰마음님의 한 부분인 마음들을 벌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큰마음님과 하나였던 우리 마음이 큰마음님과 함께 있으면서 지을 수 있는 죄가 무엇이 있을까요? 죄를 지을 수나 있을까요? 그럴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마음님의 성품과 능력에 상당한 취약점이 있다는 주장이 됩니다. 큰마음님은 그런 취약점이 없는 존재이십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아주 부자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돈이 너무 많은 이 부자가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디즈니랜드보다 더 큰 놀이공원을 만들었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받고 사람들을 입장시키는 상업용 시설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녀들만 가서 놀며 즐기는 시설을 만들었다면 그 목적은 분명하겠지요? 자기 자녀들이 그 놀이공원에서 즐기도록 하고, 자신은 자녀들이 그 놀이공원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 해가 져서 집에 돌아왔을 때 자녀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그 놀이공원에서 자기들이 했던 일을 되새기며, 그 중에서 좋았던 것, 힘들었던 것, 무서웠던 것을 회상하는 것을 들으면서 즐거움을 누리겠지요.

이 세상이 바로 그 놀이공원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고, 능력이 한없이 크신 큰마음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그곳에 큰마음님이 직접 가서 구경하고 놀고 즐기고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큰마음님은 한없이 큰 분이시고, 바닷물에 속한 물방울 하나가 분리되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마음으로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닷물에서 증발한 물방울 하나처럼 분리된 마음이 이 세상에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생명체속에 들어가서 이 세상을 경험합니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모든 존재에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 마음은 큰마음과 함께 있을 때는 동등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입고 있는 몸을 벗고 돌아가면 마찬가지로 모두 동등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몸을 벗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는 몸에 부여된 능력과 성질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재미있는 곳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한번 유추를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신형 전투기 조종사는 자기 비행기를 타면 최고 초속 1천 미터, 즉 1 킬로미터 정도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한 시간이면 3,600 킬로미터를 날아갑니다. 똑같은 조종사가 시속 100킬로미터가 최고 속도인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자기의 모든 기술을 동원해도 한 시간에 100킬로미터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의 능력은 변함이 없는데 그 사람이 타고 있는 운반체가 가진 한계때문에 그 사람의 이동 거리가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체 안에 있는 마음도 마찬가지인데, 그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능력과 조건이 그 마음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생명체이지만 그 속에 있는 마음은 모두 동일하고 동등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생명체도 자기 마음의 원래 능력과 기원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 생명체의 출생과 함께 마음도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생명체가 죽으면 마음도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체가 없으면 뭐 볼 것이 있겠습니까? 물고기가 없는 어항, 화성이나 토성처럼 생명체가 없는 별들을 바라보는 것은 5분이 지나면 싫증이 납니다. 생명체가 있는 지구는 다릅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지형지물이 변하는 모습도 볼 만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볼만한 것이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만들어 내는 변화무쌍한 드라마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큰마음님, 그리고 그 큰마음님에 속한 한없이 많은 마음들이 이 세상에서 인간과 생명체들이 만들어 내는 라이브드라마를 구경하면서 즐깁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들 중에는 멜로도 있고, 코미디도 있고, 액션도 있고, 비극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영화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장르들이 이 세상에 모두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생명들이 만들어가는 드라마에 직접 출연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를 구경하는 것, 

그리고 그 드라마의 주인공인 인간들이 이 세상을 즐기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끔씩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도 보십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좌절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고 함께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좌절과 고통이 전혀없는 놀이공원은 오래 가지 않아서 싫증이 납니다. 용인자연농원을 열 번, 스무 번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위험이 따르고 때로는 고통을 겪기도 하는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등산복을 챙깁니다. 인수봉을 열번 스무 번 오르고, 돈을 모아서 히말라야나 알프스로 원정 산행을 갑니다. 그러다가 산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 명예도 없고, 아무 소득도 없고, 올라갈 때는 고통 뿐이고, 하산할 때에도 위험한 그 짓을 계속해서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주말에 편안하게 용인 자연농원에 가서 놀지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말하면 콧방귀도 뀌지 않고 그냥 무시합니다. 아무 위험도 없고, 뻔한 놀이기구들만 있는곳에서 지내는 하루와 고통과 위험을 무릎쓰고 높은 산에 올라간 하루의 가치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래서 고통과 위험이 있고,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있는 것 뿐 아니라 분노와 불안, 좌절이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그런 분노와 불안 좌절과 슬픔이 사람들을 힘들게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면서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지고, 마침내 극복하고 나면 느끼는 만족과 성취감이 평탄하고 손쉽게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은 인간들이 계속해서 살아가고, 계속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설계되고 제작된 놀이공원입니다. 그런 제작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이 땅에 등장한 이래 계속해서 자손을 낳고, 키우는 일에 열심이라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고통과 비극이 생명체가 이 땅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듭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난 뒤에 출산율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그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 데려오는 것은 그런 경험을 해도 이 세상이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즐거움이고 기쁨이고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이 세상을 설계하고 만드신 분의 뜻과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마음님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고 간섭하거나 지시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와 능력은 이 자연과 동물,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근육의 크기와 강도, 그리고 나이에 맞춰서 분비가 시작되는 호르몬, 그 호르몬이 유발하는 인간의 감정, 그리고 생각하는 능력 등으로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대를 이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완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큰마음님은 그 분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즐기고 계십니다. 그 드라마에는 시트콤도 있고, 멜로도 있고, 액션도 있고, 재난 영화도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판단대로 만들어가는 드라마를 구경하시면서 큰마음님은 즐거움과 보람과 만족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재난과 비극도 즐기고 계신다는 설명에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피조물이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을 보면서 즐길 수 있느냐 하고,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을 오히려 심판하고 정죄하는 시건방진 인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재난 영화를 보고, 비극 드라마를 보고 즐깁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하면서 큰마음님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우기는 가소로운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드라마는 그냥 연기하는 것이고, 사실이 아니지 않느냐고? 그 드라마를 연기할 때 연기자들이 위험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연기자들이 겪는 위험과 고통은 촬영이 끝나면 사라지는 것이니까,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위험과 고통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이 인생이 끝나면 더 이상 이 세상의 위험과 고통을 겪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점은 배우들을 한 영화 촬영이 끝나면 자기의 본래 삶으로 돌아가는데, 인간은 죽으면 돌아가는 자기 인생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나면 돌아가는 곳이 액션영화 배우들이 촬영이 끝나면 돌아가는 자기 집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곳에서 놀고 쉬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구경하고 즐기고 있다면? 그러다가 또 출연하고 싶어지면 다시 이 세상에 들어와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영화배우와 인생이 다른 점 하나는 영화배우는 자기가 예전에 연기했던 배역을 기억하고, 연기가 끝나면 돌아갈 자기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인생은 예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 생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더욱 심각하고 진지하고 모든 연기자들이 최대한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인생들이 만들어내는 실생활 모습이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큰마음님은 인간들이 예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 생이 끝나면 돌아가는 곳이 어떤지 알지 못하도록 해서 이 세상이라는 놀이공원의 신비와 즐거움이 최고로 유지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요청을 하면 특별히 개입을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놀이공원의 운행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손을 써 주십니다. 이렇게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날에 용인 에버랜드에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모두 기대와 흥분을 안고 갑니다. 그런데 너무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설 하나를 타려면 30분 1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에사입니다. 종일권을 샀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줄서서 기다리는 데 보냅니다. 오후가 되면 즐거움보다 지치고 실망한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부모가 에버랜드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그 가족에게는 특별 대우를 해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매번 제일 먼저 놀이기구를 타게 해 준다면? 그러면 그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기구를 타고, 훨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요.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고 불평하기 때문에 에버랜드 사장의 가족이라도 그렇게 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만드신 그 분은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아주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이 진행되는데, 사실은 특정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사람들이 행동해서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도록 만드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물론 이 천지를 만드신 그 분, 큰마음님입니다. 

그 분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한가지 경우는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일 쉽습니다. 인간의 몸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 몸의 고장난 부분을 고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만약 특정 장기가 너무 상해서 수리할 수 없으면 그 장기를 새걸로 바꿔버립니다. 자동차를 만든 회사에서 고장난 자동차의 부품을 바꿔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 생각에는 똑같은 장기인데, 사실은 그 분이 교체해서 새로 설치한 온전한 장기인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 경우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물건을 구하거나, 직업을 갖거나, 사업을 성공하거나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어떻게 이루어 주실까요? 사람들을 움직여서 그렇게 합니다. 그 분은 큰마음님이시고, 우리 속에도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그 분의 마음은 서로 소통합니다. 우리가 알게도 소통하고 우리가 모르게도 소통합니다. 우리가 알게 소통하는 것은 우리가 그 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렇게 합니다. 우리 마음이 기도를 하면 큰마음님이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이루어주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은 중고자동차를 하나 갖고 싶습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 내게 마땅한 중고자동차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 자동차를 처분하고 다른 것을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정보를 다 갖고 계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줄 수 있는 분이시니까 그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그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내가 보는 중고장터에 매물을 내놓고, 그 매물이 다른 사람 눈에 띄기 전에 내가 그 광고를 보게되고, 구입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공부 안하고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들어주실까요? 물론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큰마음님께 드리는 기도와, 무당의 굿이 다른 점입니다. 큰마음님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무조건적으로 손주를 사랑해서 손주를 망쳐버리는 할아버지는 아니십니다. 공부를 안한 사람이 좋은 대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이 1년 재수를 하더라도 열심히 공부를 하도록 하든가, 아니면 대학교가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하도록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큰마음님은 이 세상이 공평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리는 놀이공원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인생에 비극이 있는가?

 이 세상은 인간과 생명체가 영속적으로 살아가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심하게 구상하고 설계해서 만들었지요. 이 지구의 생태계와 그 속의 생명체 하나 하나를 보면 아직도 인간이 흉내내지 못하는 절묘한 구조와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생명체들이 이 지구에서 살아가면서 만들어 내는 드라마를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은 구경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비극이 있느냐고요? 

우리도 밋밋한 드라마보다 고난과 역경이 있고, 비극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더 열심히 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있지만 인간을 만드신 그 분도 인간처럼 그렇게 수준낮은 즐거움을 좋아하는 분이라고 하는 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서 똑같은 분량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고, 슬픔과 괴로움이 없도록 만드셨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할 사람도 있겠지요. 그 분의 공의와 정의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다릅니다. 모든 사람, 그리고 동식물은 공정하고 만족한 시스템 속에서 이 세상을 지내다가 갑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건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화에서 잔인한 고통을 겪는 주인공 역을 하는 배우라고 생각해봅시다. 그 배우는 영화 촬영이 편안하고 쉽게 진행되기를 원할까요, 아니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걸 원할까요? 톰 크루즈 처럼 이미 성공한 배우도 스턴트 맨을 사용하지 않고, 위험한 장면을 직접 연기한다고 합니다. 그 영화촬영이 끝나고 나면 편안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고, 더 힘들게 촬영한 것일수록 더 좋은 작품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모두 언젠가는 끝납니다. 끝나고 난 뒤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기준으로 우리 인생이 평가를 받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도 끝내버립니다. 부귀영화와 쾌락도 끝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혜택입니다. 현역 사병으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은 복무 기간 중에는 각기 다른 병과와 보직을 부여받아서 생활합니다. 어떤 병과는 힘들고 어떤 보직은 심지어 권력을 갖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보직을 받은 사병이라도 전역을 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거의 모든 사병들이 전역을 하루라도 빨리 하고 싶어합니다. 편안한 장교로 3년 근무하는 것보다 고생스러운 사병으로 2년 근무하는 것을 더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군대는 제대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군대의 고생이 그 다음까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군대에 갈 때는 편안한 부대에서 편안한 보직을 받아서 군대생활을 하는 것을 누구나 희망합니다. 그래서 연줄을 동원하고 부모님 빽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 온 대한민국 남자들의 술자리에서는 서로 자기가 제일 고생스럽게 군대생활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군대 면제를 받은 사람은 대화에 끼어 들지도 못합니다. 힘들고 고생스럽게 군대생활을 했을 수록 자랑이 큽니다. 우리 인생 뒤에도 그런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